고심 끝에 꽃을 꺾은 율
조심스럽게 “사만다에게 주려고….” 한다.
두리번거리는데, 다급한 율이 눈에는 안 보이는 사만다.
엄마는 아들을 데리고 주차장을 질주해서 차에 막 타려는 사만다 엄마를 불러 세웠다.
수줍게 꽃을 건네고는 빠이 하고 그냥 휙 돌아서는 서율
“율이, 사만다한테 꽃 줘서 좋아?” 하고 물으니
“나는 남자니까…. 꽃을 준거야” 하고 허세를 뿜어낸다
“멋있다 율이. 여자한테 꽃 주는 남자는 멋있는 거야” 하니까
“하하…. 내가 좀…. 그래” 하고 허세를 두 번 뿜어낸다.
집에 도착해서 차에서 내려주며 뽀뽀 좀 하자 했더니
"나는 사만다한테 뽀뽀 할 건데?!"
"그럼 엄마는?"
"엄마는 아빠랑 해! 엄마랑 아빠랑 짝꿍이잖아." 하며 비싸게 굴었다.
이 이야기를 하니 사람들은 나더러 서운해하지 말라고 한다 .
자식이 품에서 떠나는 게 슬프겠다고 한다 .
사실…. 나는 너무 뿌듯하고 즐거웠는데….
이 사람이 뒤집기를 할 때도, 우뚝 설 때도, 걸을 때도, 나를 피해 도망가며 뛸 때도
아이가 순리대로 시간 따라 크는 모습을 보는 게 즐겁고 감사했다.
그리고 이 사람이 자기도 사람이라고 혼나면서도 자기주장을 펼치는 사람이 되는 것도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엄마한테 뽀뽀를 아끼고
꽃 한 송이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준비하는 남자가 돼가는 것도
웃음이 나게 행복하고 즐겁다.
심지어 내 곁에서 이렇게 예쁘게 커 주는 게 고맙다.
내 아들, 내 자식이라는 욕심을 비워내면 온전한 개인인 율이가 보인다
그 사람은 사랑을 하고, 사랑을 표현하고, 그 사랑을 아낀다.
그리고 엄마인 나는 아들에게 서운할 이유가 없다.
그런 사람으로 성장하는 모습이 감사하지 내 아들 빼앗긴 느낌은 없다.
키워 남준다는 말. 그런 말을 애써 부인하고 싶다.
키웠으니 내것이라는 논리를, 은연중에 아이를 소유물로 여기게 하는 표현을 애써 부인한다.
사랑하는 그 아이는 내 자식이지만 그 자신이기도 하다.
그 아이의 취향, 생각, 감정을 인정할 수 있으려면,
그 아이를 온전한 한 사람으로 대할 수 있으려면,
나는 그 마음을 비워야 했다.
'내 아이'에서 나를 빼는 것
'그 아이'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
그리고 그 비움에서 감사가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