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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평화로운 엄마
    육아Logue 2013. 9. 6. 14:35

    정신없이 연애를 시작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신혼여행 중이었다.

    미국으로 돌아와 둘만의 치열한 신혼을 미처 다 보내기도 전에 아가가 생겨 기다리는 중이다.

     

    사실, 아이가 안 생기거나 늦을까 봐 두려워하는 맘도 있었고 더 나이 먹어 힘들기 전에 생겨 다행이긴 하지만

    그래도 내 뜻 밖에서 일어난 일이라 어쩌나 싶기도 했다.

    내가 존재를 알기도 전에 존재가 이미 생겨 준비 완료가 되어있던 이 부지런한 녀석이 신비롭기도 하지만

    그래도 결혼 두 달만은 좀 빠른 거 아닌가 싶기도 했다.

    (, 신혼의 치열함을 평화와 편안으로 바꿔 준 녀석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는바이지만서도...)

    그렇다...

    임신한 여성이 느끼는 보편적인 감정이란 게 어떤 것일지는 모르겠지만

    내겐 조금 이른 느낌의, deal을 해야 하는, 난이도가 좀 있는 game quest를 받은 느낌이었다.

     

    콩알보다도 작았던 이 녀석의 생성으로 내 일상은 모조리 틀어졌다.

    먹고 자는 기본적인 활동이 불가능해졌다.

    내 몸이 내 몸인데 내 몸이 아니어서 억울했고

    사랑스럽지도 않은 변기를 부여잡고 연신 토하며 아까 간신히 먹은 음식물의 소화 중간 단계를 확인하고 위액이니 피니 쏟아내기가 힘들었고

    입덧에 터져버린 눈의 실핏줄들과 거칠어지는 피부를 비롯한 신체변화와 함께 final paper들이 밀려와 스트레스를 받아야 했다.

    내 뜻이나 의지와는 상관없이 변해가는 내 몸과 원래의 나와는 다른 감정과 식욕 등은 아가의 존재를 인정하게 하면서도 나란 존재는 뭔가... 싶어지게 했다.

    입덧이 끝나고는 배가 쑥쑥쑥 튀어나오기 시작한다.

    녀석도 그 좁은 뱃속에서 쑥쑥쑥 커 대느라 스트레스를 받겠지만, 녀석의 커짐과 함께 걱정도 커져간다.

    .... 이 한 명의 인간을 감당해 낼 수 있을까?

     

    난 아이들을 좋아한다. 또 제법 잘 가르친다.

    나름 경력과 함께 신념을 쌓아온 선생이고 전도사다.

    사람들은 내가 자신의 아이를 갖게 된 것에 어떤 자부심과 햇살처럼 따뜻한 감성을 가질 거라 생각하고 나도 그럴 줄 알았지만,

    막상 임신이라는 걸 하고 보니

    나란 인간

    내 애는 왠지 내가 가져온 교육관이나 훈육원칙 따위를 따를 수 없을 것 같아 자신 없기도 하고

    애를 위해 뭔가 열혈 태교 따위.. 아니 그냥 하는 태교도 부담스러워 안 하게 된다.

    무슨 임산부는 먹지 말아야 할 것, 먹어야 할 것, 해야 할 것,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그렇게나 많은지 짜증과 심술이 나고

    그 놈의 태교는 뭐 그리 빡세신지 그대로만 하면 온 세상 아이들은 다 천재가 날 것 같아 빈정이 상하며

    아이가 태어날 때 준비해야 할 물품은 뭐 그리 많은지 식비도 빠듯한 유학생 부부의 기둥뿌리를 뽑아 빚으로 져야 할 것 같은 기세라 심란하다.

     

    그렇게 심술 가득한 고민의 시간을 거치며 내린 결론은 '됐다'였다.

     

    신랑에게 물어봤다. 만약 아이가 공부를 못하거나 싫어하면 어쩔껀지.

    그랬더니 "그럼 뭐라도 지가 좋아하는 게 있겠지 뭐.. 그거 시키면 되지..."한다.

    과연 우리가 욕심 없이 그럴 수 있을지는 아직 닥쳐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일단 둘 다 애가 뭐 대단한 천재이거나 재능 있는 아이이길 기대하는 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태교도 그냥 욕심 없이 하기로 했다.

    은은한 커피를 한잔 마셔서 기분이 좋은 편이 임산부에게 좋은 음식일 테고

    책 읽어주기 따로 안 해도 스트레스 안받고 쉬고 놀고 방학을 즐기는 게 태교일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늦은 저녁 신랑이랑 둘이 소파에 기대서 영화 보는 거면 영상미도 예술이니 나름 태교일 테고 부모 둘이 사이 좋게 놀고 있으니 교감일 테고,

    클래식이 아니더라도 마음 촉촉히 적셔주는 노래나 흥이 돋는 노래라면 음악태교도 될 테니까.

    임산부의 적정 몸무게라든지 운동량이라든지 식단 같은 것도 적당히 생각하기로 했다.

    맘 편히 맛나게 먹고 움직일 수 있을 만큼 움직여서 나만 건강하면 애도 따라 건강할 테고

    어차피 내가 어쩔 수 없는 건 신경 써봤자 바꿀 수도 없을 테니까.

     

    이제 석 달 후면 녀석은 내 몸 밖으로 나와 자기 가족 뿐만 아니라 세계 인구수 증가에 기여하며 자기의 존엄성을 인정받는 존재가 될 거다.

    녀석도 이미 사람이고 하나의 인격체인데 부모가 '키운다'라는 생각도 집어치우기로 했다.

    난 그 아이를 내가 돌봐줄 수 있을 만큼 돌봐주고 내 삶에 들어와 태연히 잘 살고 있는 신랑처럼 같이 행복하게 살아주면 된다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녀석은 감당해서 키워야 할 자식이 아니라 우리랑 함께 살게 될 한 사람이니까.

     

    이 빡센 난이도의 quest가 다음 단계에서 어떻게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이 정도면 '됐다'.

    그리고

    '됐다'. 평화 녀석도 지 엄마같이 생각할른지는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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