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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상같은 죽음
    일상같은 죽음 2012. 1. 25. 17:54

    무작정 갔던 그 나라에서

    처음 만난 무서운 추위와 온 세상이 하얗게 낯선 환경, 털모자와 두꺼운 옷 사이로 잘 보이지 않던 사람들보다도 더 실감나게 내가 다른 나라에 있음을 느끼게 해주던 것이 바로 언어였다.

    말이라는 건

    사람과 공간, 시간을 아우르는 - 단순히 음성기호의 조합이상의 어떤 살아있는 것이었다.

    처음 러시아를 갔을 때, 나는 러시아 알파벳도 몰랐었다.

    귀에 들리는 음들의 차이조차 들을 수 없을 만큼 생소했던 발음들과 따라서 소리 내기도 어려웠던 ‘안녕하세요’라는 그 단순한 인사말조차 엄청난 벽이었다.

    그 벽을 온몸으로 뚫고 내게 러시아라는 나라를 보여주는 창을 만들어 주었던

    첫 번째 러시아어 교수님이 바실리 니꼴라예비치였다.



    말쑥하게 양복을 차려 입고 들어와 수업을 시작하지만

    교실문을 나설 때는 머리는 헝클어져있고 온 몸은 분필가루로 범벅이 되었으며, 심지어 셔츠는 바지에서 빠져서 마치 산을 헤매다 간신히 빠져 나온 조난당한 등산객 같은 모습이었다.

    우유를 사려는 날엔, 우유를 사는 dialogue를 만들고 써주고 외워주고 그 다음날엔 확인해줘서

    어느날엔 우리집 살림을 꿰뚫고 있기도 했었다.

    그의 수업은 늘 유쾌했다.

    정확한 발음을 보여주고 듣게 해주기 위해서 입모양을 일부러 크게 해서 또렷하게 발음해줬고 그 모습은 제대로 코미디였다.

    단어 하나를 설명하기 위해 그림부터 일인극까지 선보였는데 그렇게 알려준 단어는 절대 잊혀지지 않았다.

    그 학교에서 몇 년을 더 공부한 후 알게 된 사실은

    바실리 니꼴라예비치가 사실은 학부장이고, 명망있고 실력있는 교수였으며, 학생들의 신임과 존경을 받는 선생이었다는 것이었다.

    그런 그가 굉장히 겸손하고 열정적으로 나와 엄마, 동생 이렇게 셋뿐인 한국인 학생들을 가르쳤다는 것이 나를 감동시켰었다.

    그렇게 멋진 교육자였지만 한편으로 교활하지만 실력없는 정치가여서 학교의 권력다툼에서 밀려나 결국 다른 도시 다른 학교로 가게 되었다.

    덕분에, 그의 책임하에 있던 나도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어 졸업을 일년 앞두고 학교에서 짤릴뻔 했었다.

    그가 떠난 후에 몇 번이나 학장실에가서 얼마나 악착같이 새로운 학장과 싸워댔는지 기억도 안 난다. 그렇게 싸워대던 내 뒤에서 우리 학부의 학생들은 나와 자신들 스스로를 부모 잃은 자식들이라고 표현했었다.

    그렇게 러시아에서 보낸 내 대학시절 중 가장 힘들었던 시간들의 중심인물이었던 그가 죽었다.

    그런데

    그의 심장이 멈추던 그 날에

    나는 San Diego에서 멋진 해변가를 걷고, 맛난 음식을 먹고, 근사한 일몰을 보았다.

    그렇게 즐거운 하루를 보내고 돌아와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했을때의 기분이란

    너무나 분명한 삶과 죽음의 경계가 너무가 가까이 있어 목줄기가 뻣뻣해지는 긴장감이었다.

    누군가의 삶에 대단한 영향을 미쳤던 사람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누군가는 그 삶을 일상으로 영위하며 살아간다.

    나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이들이 이렇게 끄떡없이 살아주길...

    새로운 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창을 내주고

    그 언어의 살아있음과

    그 언어를 통해 만나는 사람들의 내면을 보게 해주었던 사람.

    그를 조금 더 오래 기억할 수 있기를.

    on Friday, January 20, 2012 at 4:00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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